리더스 포럼 & 토론
누가 공공재인가: 떠날 수 있을 때 떠나라
- 더나은 3일 전 2026.06.08 12:54
-
6
0
호주에는 공공 환자(public patient)라는 개념이 있다. 환자가 자신이 공공환자로 치료를 받을 것인지 사적 환자(private patient)로 치료받을 것인지 선택할 수가 있는데 일단 공공환자로 치료받기로 선택하면 모든 것을 시스템이 정해주는 대로 따라야 한다. 의사도 환자가 선택하지 못한다. 대신 자기 부담은 없다.
국가가 운영하는 공립병원에 입원해서도 공공환자로 치료받을 것인지 사적 환자로 치료받을 것인지 환자가 선택할 수 있다. 사적 환자로 치료받겠다고 선택하면 메디케어에서 정한 가격의 (전체가 아닌) 일정 비율만 지불하고 나머지 차액은 환자가 부담한다.
안양수 대한병원의사협의회 고문 겸 미래의료포럼 정책고문
거의 모든 국민에게 소득의 일정 비율을 거둬들이는 준조세 성격의 사회보장제도를 운영하는데 왜 굳이 공공 환자라는 개념을 도입했을까. 조금 생소하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개념이 숨어 있는데 국민의 호주머니에서 갹출해서 기금을 마련했지만 그렇게 모인 기금 자체를 ‘공공재’로 본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나라들이 국민 세금으로 조성된 ‘사회보장기금(재정)’ 그 자체를 국가의 유한하고 소중한 공공재로 본다. 사실 당연한 이야기다. 그리고 의사와 병원은 그 한정된 공공재(기금)을 낭비 없이 가장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집행하기 위해 통제되는 ‘운영 장치’로 인식한다. 그래서 그 기금이라는 공공재를 아끼기 위해서 의사에게 철저한 문지기(Gatekeeper) 역할을 맡기고, 환자에게는 의사 선택권을 제한하는 통제를 가한다.
그뿐만 아니라 제법 많은 나라가 이 공공재를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우선순위위원회를 운영한다. 공공의 혜택을 마구잡이로 혹은 정치적 목적으로 퍼주어 재정을 고갈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급여 범위를 정할 때부터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다. 건강한 여생 기간에 대한 영향, 질병으로 인한 고통, 타인에 대한 영향과 치료의 효과성 등을 과학적으로 따져서 우선순위를 정하고 우선순위가 높은 것부터 급여해 준다. 여기서 QALY(Quality-Adjusted Life Year)라는 개념이 나온다.
영국 보건사회부는 국립임상개선위원회(NICE)에 임상효과와 경제성 평가를 의뢰해 그 평가 결과를 바탕으로 급여 대상을 결정한다. NICE는 단순 자문 기구가 아니라 사실상 급여 여부를 결정하는 기술평가기관으로 임상적 효과, 비용 대비 효과, 대체 가능성이라는 3가지 평가 기준을 가지고 급여 여부를 결정한다. 한마디로 ‘어떤 치료가 공공재원으로 지불할 가치가 있는가’를 판정한다. 이때 사용하는 핵심 도구가 QALY이다.
QALY는 ‘얼마나 오래 사느냐’와 ‘얼마나 건강하게 사느냐’를 하나로 계산한 개념이다. 쉽게 말해 ‘건강한 삶의 시간’을 숫자로 환산한 것이다. 완전히 건강한 상태로 1년을 살면 1 QALY이고, 건강 상태가 절반 정도인 상태로 2년을 살면 역시 1 QALY로 계산한다.
영국 NICE는 새로운 치료법이나 약제가 있을 때 ‘효과가 있으냐’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효과가 국민의 세금과 보험재정을 투입할 만큼 가치가 있느냐’를 함께 따진다. 예를 들어 어떤 치료가 환자에게 평균 1 QALY 정도의 건강한 삶을 추가로 제공하는데 1억원이 든다면, 그 치료가 공공재정을 사용할 만큼 비용 대비 효과가 있는지 평가하는 것이다.
즉 많은 나라들이 의료를 단순히 ‘좋은 치료냐, 아니냐’로 판단하지 않는다. 제한된 공공재원을 어디에 우선 배분하는 것이 사회 전체에 가장 합리적인가를 과학적으로 계산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최고의 치료’가 아니라 ‘공공재원으로 지불할 가치가 있는 치료인가’이다.
반면에 한국이 급여 결정 과정은 비용효과성과 우선순위 원칙이 충분히 제도화돼 있다고 보기 어렵다. 전권은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있다. 그러나 비용 대비 효과를 따진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온갖 것을 다 급여에 포함해 재정 관리한다며 병원과 의사만 쥐어짜고 있다. 급여는 명확한 원칙도 기준도 없이 다 퍼주는 복지방식으로 결정하면서 정작 그 서비스 비용을 지불할 때에는 가치를 따져 지불하겠다고 한다.
영국 의사들은 국가에서 월급을 받는 의사들이라고 하더라도 일과 시간 외에 개인 클리닉(private clinic)에서 가외 활동을 하는데 제한이 없다. 또한 개인 클리닉에서의 의료비 수준은 국가가 개입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은 급여만이 아니라 비급여까지도 국가가 개입한다. 심지어 이제는 비급여의 가격만이 아니라 횟수까지도 국가가 개입해 조정하겠다고 한다.
많은 나라들이 사회보장기금(재정) 그 자체를 국가의 유한하고 소중한 공공재로 보는 것과 달리 한국은 국가가 돈 들여 키우지도 않은 ‘의사(인적 자원)’ 자체를 국가가 마음대로 처분하고 통제할 수 있는 천연자원 같은 공공재로 규정한다. 국민이 내는 건강보험료는 이 공공재인 의사를 ‘값싸고 편리하게 뽑아 쓰기 위해 가동하는 결제 및 소모성 장치’ 정도로 취급한다.
그러다 보니 ‘내가 보험료(소모품 비용)을 냈으니 국가 소유의 공공재인 의사를 내 마음대로, 원하는 순간 가장 유명한 의사를 골라 즉시 소비하겠다’는 기괴한 소비자 주권이 형성된다. 심지어 보건의료정책을 오랫동안 했다는 사람도 의료전달체계를 말하면 “내돈 내고 내가 진료받겠다는데 그걸 왜 막아요?”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복지부 관료조차도 그걸 어떻게 막느냐고 말하는 나라이다.
내 호주머니에서 나왔다고 공적기금을 내 돈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생리현상(physiology)이 아니라 병리현상(pathology)이다. 더구나 인사이트(insight)도 없다. 인사이트 없는 사회 병리현상은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소생 가능성이 없다.
영화 ‘매트릭스’를 보면 파란약과 빨간약을 선택하는 장면이 있다. 빨간약을 먹으면 시스템이 구축한 허구의 세상이 한눈에 들어오게 된다. 현실 세상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빨간약과 파란약을 선택한 사람들로 나뉜다. 그리고 끝내 빨간 약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미 스스로 파란 약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단순히 속고 있는 게 아니다. 제도가 선한지 악한지에는 큰 관심이 없다. 누가 옳고 그른지도 사실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파란 약을 주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 안에서, 최대한 자신의 편의와 이익을 얻으며 살아가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대신 그 대가로 파란 약을 주는 사람들에게 더 큰 권력과 정당성을 넘겨준다. 그 구조가 반복되면서 시스템은 점점 더 단단해진다. 그래서 아무리 설명해도, 아무리 데이터를 보여줘도, 아무리 현장의 현실을 이야기해도 결국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
나는 오랫동안 설득하면 바뀔 수 있다고 믿었다. 이해시키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믿음 자체가 헛된 망상이었을 수도 있다는걸. 상대가 진실을 몰라서가 아니다. 어쩌면 이미 자기 방식대로 세상을 선택한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거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계속 “그러다 결국 무너진다”고 반복해서 말하면 어느 순간 사람들은 경고가 아니라 협박처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잘못된 것 같지만 어쨌든 지금까지 굴러왔고, 앞으로도 별일 없이 유지될 거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지금 고쳐야 한다”는 말 자체가 과한 불안증처럼 들릴 뿐이다.
마치 5미터짜리 방파제만 있어도 평생 큰일 없이 살아왔는데,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10미터, 20미터 쓰나미를 막겠다며 더 높은 방파제를 쌓자고 하는 사람을, 쓸데없는 오지랖이자 세금 낭비라고 치부하는 것과 비슷하다.
아무리 내가 옳다고 믿고 있어도, 상대가 듣기 싫어하는 말을 무시하고 반복하면 결국 잔소리로 들리고, 쓸데없는 오지랖이 되며, 심하면 선동꾼 취급까지 받게 된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정말 이 말만은 하고 싶다.
당신이 이미 빨간 약을 먹은 사람이라면, 더 이상 이 세상을 바꾸겠다고 자기 인생을 갈아 넣지 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애초에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을 깨우겠다고 애쓰다 보면 결국 망가지는 건 시스템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다.
그러니 괜한 사명감에 붙들리지 말고, 아직 떠날 수 있을 때 떠나라. 자기 삶까지 희생하면서 끝없는 벽에 머리를 박고 살 필요는 없다.

- 이전글그림의 떡이었던 식민지 조선의 골드러시2026.06.0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